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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가쓰라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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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가쓰라 내각은 1912년 12월 21일부터 1913년 2월 20일까지 가쓰라 다로가 이끈 일본의 내각이다. 가쓰라는 입헌정우회와의 협력 관계를 청산하고 신당 결성을 추진했지만, 제1차 호헌 운동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혔다. 다이쇼 정변으로 가쓰라 내각이 붕괴되었고, 이후 가토 다카오키가 가쓰라의 유지를 이어 입헌동지회를 결성하여 정우회와 함께 일본 양당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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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가쓰라 내각
내각 정보
내각 이름제3차 가쓰라 내각
일본어 표기第3次桂内閣
대수15대
여당HoP 블록: Sawakai
의회 지위소수당
의회 임기1912–1915
이전 내각제2차 사이온지 내각
국가 원수다이쇼
국가 원수 직함천황
정부 수반가쓰라 다로
정부 수반 직함내각총리대신
해산일1913년 2월 20일
구성일1912년 12월 21일
가쓰라 다로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재임 기간1912년–1913년
관할 지역일본
내각 번호15대
후임 내각제1차 야마모토 내각
명단내각 각료 명단 (일본어)
기타 정보
특징관료 내각

2. 성립 배경

20세기 초 일본은 이른바 '게이엔 시대'라 불리며, 육군 군벌 출신 관료 가쓰라 다로와 중의원 제1당인 입헌정우회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총리직을 맡았다.[6]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정당 내각 도입을 반대하는 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우회를 이끌며 이권 정치에 몰두하는 하라 다카시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6]

1912년, 육군의 '두 개 사단 증설 문제' 요구를 둘러싸고 정국 혼란이 발생했다.[6] 육군대신 우에하라 유사쿠가 사임하고 후임자를 내지 않으면서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무너졌다.(군부대신 현역 무관제)[6] 이후 원로 회의는 가쓰라 다로를 총리로 추대했고, 정계 복귀를 노리던 가쓰라는 이를 수락하며 제3차 가쓰라 내각이 성립되었다.[6]

3. 내각 구성

제3차 가쓰라 내각은 1912년 12월 21일에 가쓰라 다로내각총리대신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내각은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주요 각료들과 그 외 내각 서기관장, 법제국 장관으로 구성되었다.

직책대수성명주요 경력재직 기간
내각총리대신15가쓰라 다로공작, 육군 대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외무대신25가쓰라 다로공작, 육군 대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1월 29일겸직
26가토 다카아키주영공사, 도쿄니치니치신문 사장1913년 1월 29일 ~ 1913년 2월 20일
내무대신28오우라 가네다케자작, 농상무대신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대장대신20와카쓰키 레이지로대장차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육군대신20기고시 야스쓰나남작, 육군 중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해군대신17사이토 마코토남작, 해군 중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사법대신17마쓰무로 이타스자작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문부대신23시바타 가몬내각서기관장, 척식국 총재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농상무대신24나카쇼지 렌체신차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체신대신20고토 신페이남작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그 외에 에기 타스쿠가 내각서기관장, 이치키 기토쿠로가 법제국 장관을 맡았다.[4] 이들의 재직 기간은 1912년 12월 21일부터 1913년 2월 20일까지였다.

3. 1. 국무대신

직책성명주요 경력재직 기간비고
내각총리대신가쓰라 다로공작, 육군 대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외무대신가쓰라 다로공작, 육군 대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1월 29일겸직
가토 다카아키주영공사, 도쿄니치니치신문 사장1913년 1월 29일 ~ 1913년 2월 20일
내무대신오우라 가네다케자작, 농상무대신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대장대신와카쓰키 레이지로대장차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육군대신기고시 야스쓰나남작, 육군 중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해군대신사이토 마코토남작, 해군 대장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사법대신마쓰무로 이타스자작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문부대신시바타 가몬내각서기관장, 척식국 총재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농상무대신나카쇼지 렌체신차관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체신대신고토 신페이남작1912년 12월 21일 ~ 1913년 2월 20일


3. 2. 기타 관료

에키 다스쿠는 제3차 가쓰라 내각의 내각서기관장으로, 1912년 12월 21일부터 1913년 2월 20일까지 재직했다.[4] 척식국 부장을 지냈다.

이치키 기토쿠로는 제3차 가쓰라 내각의 법제국 장관으로, 1912년 12월 21일부터 1913년 2월 20일까지 재직했다.[4]

4. 주요 정책 및 활동

게이엔 시대사이온지 긴모치와 번갈아 정권을 맡았던 가쓰라 다로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불화가 심해져 다이쇼 천황 즉위 후 내대신 겸 시종장을 지내고 있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이 총리직을 고사하면서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다시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가쓰라는 야마가타에 의존하지 않고 관료 중심 내각을 조직했으며, 사이토 마코토를 해군대신에 유임시켰다.[1]

가쓰라는 입헌정우회에 반대하는 세력을 합쳐 신당을 만들려 했으나 야마가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국민들은 가쓰라가 정권 복귀 야욕을 품고 제2차 사이온지 내각 붕괴를 조종했다고 생각했다.[1]

이에 '헌정옹호·문벌타파'를 내건 헌정 옹호 운동이 일어났다. 가쓰라는 야마가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입헌정우회 결성 선례를 따라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그러나 오자키 유키오의 내각 불신임안 연설 후 가쓰라가 제국의회 정회를 명령하자 의사당은 군중에 포위되었다. 다이쇼 천황의 조서를 통해 입헌정우회에 내각 협력을 요청했으나, 사이온지 총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당의에 따라 거절되었다. 결국 가쓰라는 정회 연장을 명령했고, 도쿄 시내는 혼란에 빠졌다. 중의원 의장 오오카 이쿠조의 설득으로 가쓰라는 내각 총사직을 결단했다(다이쇼 데모크라시).[1]

이후 가쓰라는 병으로 사망하여 신당 입헌동지회 출범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야마가타의 지위는 변함없었다.[1]

5. 다이쇼 정변과 내각의 붕괴

1912년(다이쇼 원년) 12월, 게이엔 시대에 번갈아 정권을 맡았던 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 중 가쓰라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불화로 내대신 겸 시종장으로 있었다. 원로 마쓰카타 마사요시가 고령으로 사퇴하고, 야마모토 곤노효에히라타 도스케도 사퇴하여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다시 추천했다. 가쓰라는 야마가타에 의존하지 않고 관료 중심 내각을 조직, 사이토 마코토를 해군대신에 유임시켰다. 가쓰라의 신당 구상은 야마가타의 반대에 부딪혔고, 국민들은 가쓰라의 정권 복귀 야심과 제2차 사이온지 내각 붕괴 배후로 가쓰라를 지목했다.

두 개 사단 증설 문제로 우에하라 유사쿠 육군대신이 사임하고 후임 대신을 내지 않아 제2차 사이온지 내각이 붕괴되자(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가쓰라가 총리로 추대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가쓰라는 입헌정우회 이외 신당 결성을 추진했으나, 이는 민중의 제1차 호헌 운동을 촉발시켰다.

'헌정 옹호, 문벌 타파'를 기치로 헌정 옹호 운동이 일어났고, 가쓰라는 신당 구상으로 대응하려 했다. 오자키 유키오의 내각 불신임안 연설 후 가쓰라가 제국의회 정회를 명하자 의사당은 군중에게 포위되었다. 다이쇼 천황의 조서로 입헌정우회에 협력을 구했으나, 총재 사이온지 긴모치의 설득에도 당의는 거부했다. 가쓰라는 정회 연장을 명했으나, 군중은 격앙되어 도쿄는 혼란에 빠졌다. 중의원 의장 오오카 이쿠조의 설득으로 가쓰라는 내각 총사직을 결단했다(다이쇼 정변).[6] 가쓰라는 병으로 쓰러져 신당 입헌동지회 출범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6. 붕괴 이후

다이쇼 정변 이후,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입헌정우회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을 지원하며 여당으로 복귀했다. 한편, 가쓰라 다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지만, 제3차 가쓰라 내각에서 정계에 진출한 가토 다카아키가 그 유지를 이어 입헌동지회를 결성했다.[6] 이는 훗날 입헌민정당으로 발전하여 정우회양대 정당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7. 평가 및 영향

게이엔 시대가쓰라 다로사이온지 긴모치가 번갈아 정권을 맡았으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불화로 가쓰라는 내대신 겸 시종장을 지내고 있었다. 마쓰카타 마사요시 등이 총리직을 사양하면서 야마가타는 가쓰라를 다시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가쓰라는 야마가타에 의존하지 않고 관료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했으며, 사이토 마코토를 해군대신에 유임시켰다. 가쓰라의 신당 구상은 야마가타의 반대에 부딪혔고, 국민들은 가쓰라의 정권 복귀 야욕과 제2차 사이온지 내각 붕괴 배후로 가쓰라를 지목했다.

이에 '헌정옹호·문벌타파'를 내건 헌정 옹호 운동이 일어났고, 가쓰라는 신당 구상으로 맞섰다. 그러나 오자키 유키오의 내각 불신임안 연설 후 가쓰라가 제국의회 정회를 명령하자 의사당은 군중에 포위되었다. 천황의 조서로 입헌정우회의 협력을 얻으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가쓰라는 정회 연장을 명했지만, 군중은 격앙되어 도쿄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중의원 의장 오오카 이쿠조의 설득으로 가쓰라는 총사직을 결단했다(다이쇼 데모크라시). 가쓰라는 병으로 사망하여 신당(입헌동지회) 출범을 보지 못했고, 야마가타의 지위는 변함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군부의 정치 개입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의 힘이 충돌한 것으로, 일본 정치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군부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다이쇼 정변은 일본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이 표출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Third Katsura Cabinet http://www.kantei.go[...]
[2]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1912-12-21
[3] 간행물 『官報』号外「叙任及辞令」 1912-01-29 # 13월은 잘못된 표기로 추정, 1월로 수정
[4] 간행물 『官報』第120号「叙任及辞令」 1912-12-23
[5] 문서 대우 겸무는 경시청 경부로서 벌도대를 이끈 공으로 육군 중위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정식 군인은 아니다.
[6] 문서 그러나, 제1차와 제2차를 포함하면, 계는 아베 신조에 이어 역대 내각 사상 2번째 장기 재임 수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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